편의상 각 인물들을 이름으로 칭합니다.
저는 여성3인칭대명사(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스젠더링 아닙니다.
저는 트랜스여성 당사자가 아니며(논바이너리), 이와 같은 전근대 사회에 살아 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 경험이 반영되지도 못하였고, 해결 과정이 작위적입니다.
저녁을 먹은 후, 붉게 타는 노을이 땅 위를 덮을 무렵이었다. 얼기설기 지은 임시 거처는 허름했고, 아무렇게나 세워진 기둥들이 구조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거처의 내부는 여러 제자들의 말소리로 북적였으나, 한두 사람이 잠시 그 소란을 피해 잠깐 앉아 있을 정도의 공간쯤은 마련되어 있었다. 안회는 낮의 소동과 고된 저녁일을 뒤로하고 그곳으로 피신해서는 쪼그려 앉아 뒷벽에 몸을 기대었다.
중유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곁에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듣자하니, 밥을 짓다 윗부분을 조금 떠먹은 걸 가지고, 다른 아이들이 일러바친 모양이구나*.
안회는 부끄러운 듯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들으셨습니까 그 일. 스승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지만..., 그런 일로 물의를 빚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니.... 사람들이 그렇게 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을 보아하니, 내가 괜히 너에게까지 잡일을 떠맡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나 혼자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제가 다른 일을 맡았어도 똑같았겠지요. 저는 정말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형께서 제게 그 일을 맡긴 것이 저를 향한 배려였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둘의 사정을 전혀 몰랐던 스승은 중유가 또다시 제 어린 제자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회는 바로 중유의 의중을 파악하고 거기에 동조했다. 그는 곧장 나서서, 자신은 아무래도 후배 자공처럼 돈을 잘 벌어올 만한 인물도,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의 이 긴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도 아니니, 밥 짓는 일을 비롯한 소일거리를 도맡아 하고자 한다고 청했다.
중유는 보이는 것 만큼 제 조카뻘이나 되는 아이에게 쓸데없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승이 보기에는, 배우는 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한창 도를 익히는 과정에 있는, 게다가 자신의 뜻을 이어야 하는 이 작은 아이에게 무리하게 소일거리를 맡기는 것이 꽤나 탐탁치 않았던 듯했다. 스승은 뒤에 애제자를 따로 불러서 타일렀다.
그렇게 참아넘기지 않아도 된다. 형제간에는 서로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유와 너는 서로 의義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냐. 비록 사형이라고 하더라도 부족한 점은 서로 고해 주는 것이 좋은 관계인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집안 식솔들은 모두 고향에 두고, 13년 간 천하를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그들의 무리는 스승과 제자뿐이었으니 그들 중 누군가는 여인이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여인이 해야 할 일을 여인이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막상 일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는, 단지 순수한 만족감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고와 조우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즈음 저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둘은 멍하니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제 몸을 보는 것은 여전히 불쾌하며, 관을 쓰는 것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육예를 익힐 때가 좋습니다. '여인의 일'을 맡는 것만으로 참 많은 것들이 해소가 됩니다만, 배우고 익힐 때만큼 즐겁지는 않습니다. 제 말은 거짓이었던 걸까요? 저는 저에 대해 거짓된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중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회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안회는 차마 중유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토록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후배의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안 되는 말이 너는 그래도 여전히 너라는 말이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도 장검을 좋아한다.****
...예?
중유의 입에서 나온 뜬금 없는 한 마디에, 안회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중유 역시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 그렇겠구나. 생각해 보면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의 부끄러운 과거이나,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
중유는 눈을 감고 제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스승님을 알기 전에는 산으로 들로, 온갖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사냥하며 다녔지. 내 어머니와 누이는 하지 않으셨던 일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일을 싫어하고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질 못했다. 물론 그 때는 아무 것도 몰랐을 시절이었지. 하지만 가족들이 나를 아들로서, 남동생으로서 대하는 것이 괴로웠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는 너와 같은 이유로 많이 고민했다. 땅에 머리만 대면 잠들었던 사람도 배움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잠들지 못하는 밤 역시 많아진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둘은 어느새 함께 눈을 감고, 같은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안회 자신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시점이었는데도, 그 당시의 중유의 감정은 마치 차디찬 눈발의 한기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어왔다. 그 정도로 강한 감정적 동화同化는 안회의 특기이기도 했지만, 그들과 같은 류類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거쳐갈 고민이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인仁이 그토록 유할 수 있다면, 여인 또한 이토록 용맹할 수 있을 거라고.
그제서야 안회는 중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스승이라는 여과지를 거쳐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승의 언어로 세상의 개념들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그에게는 인仁에 용맹함이나 무武와 관련된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닿는 개념은 많이 희석된 것이었다. 3개월이나 인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 더는 본인에게 고통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그들의 스승의 가르침이란 그런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무엇인가가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냐, 아니면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너를 사내로 만드는 것이냐?
...알았습니다. 그 둘은, 서로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상관 없는 것이다. 네가 배우길 좋아하는 것은, 네 성품이 군자에 가깝다는 것을 말할 뿐,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군자는 적고 소인은 많으니******, 사내 중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가 적고, 여인 중에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가 적을 것이다. 우리 문인 칠십여 명 중에서도 스승님께 그런 칭찬을 받은 아이가 너 하나뿐이니, 하물며 지금의 세상 사람들 중에게서이겠느냐.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한 속성을 가지고 뚜렷이 두 종류로 나뉘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에게는 '서로 상관없는' 수많은 속성들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 속성들의 조합으로 표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안회는, 여러 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스승의 도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만했다. 중유는 스승의 도는 언젠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이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분의 도가 이런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이 애제자의 말과 행동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 증거 가운데 하나일 것이었다.
중유는 언젠가 자신들을 비롯한 모두에게서 오늘과 같은 고민들이 한없이 작은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런 날은 언제가 되어야 오는 것인가. 그들의 고민이 한없이 작아지기에는, 그 품고 있는 비밀은 여전히 스승에게 직접 말씀드리기에는 두려운 것이었고, 서로에게 결례가 될까 실수로라도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들은 그들만의 작은 공간에 박혀, 스승의 지난 가르침을 선반에서 꺼내 와 이렇게 저렇게 돌려 보고 적용해 보면서 스스로의 나아갈 길을 찾는 작업이 필요했다. 마치 밥 짓는 일과 같이, 그 과정에서 그 가르침에 떨어진 그을음은 도려내서 먹어 버리고, 새하얀 밥을 얻을 수 있도록. 비록 여인의 마음이나, 올바른 도로, 군자의 덕으로 향할 수 있도록. 좁고 복잡하고 허름한 구조물 속, 유일하게 숨돌릴 틈이 허용된 이 작은 공간에서 말이다.
참고한 것
*『공자가어』「재액」, 顔回仲由炊之於壤屋之下, 有埃墨墮飯中, 顔回取而食之. 안회와 중유가 흙으로 만든 지붕 밑에서 밥을 지었다. 그런데 마침 티끌과 그을음이 솥 안의 밥으로 떨어졌다. 안회는 그것을 떠서 먹었다.
**『논어』자로 28, 子曰:"切切, 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 偲偲, 兄弟怡怡."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간절하고 자세히 권면하며 화기애애하면 선비라 할 만하다. 벗에게는 간절하고 자세히 권면하고 형제에겐 화기애애하라. "
***『논어집주』안연 23, 友所以輔仁, 故盡其心以告之, 善其說以道之. 然以義合者也, 故不可則止. 벗은 인을 돕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다하여 고하고, 그 말을 잘 하여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의로써 합한 관계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공자가어』「자로초견」, 子路初見孔子. 子曰, 汝何好樂. 對曰, 好長劒. 자로가 공자를 처음 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는가? 자로가 대답하였다. 긴 칼을 좋아합니다.
*****김세서리아, 『공자, 페미니즘을 상상하다』, 36p, 공자에게서 인의 내용은 남자다움이 아니라 도덕성, 인격, 인간다움, 인간을 사랑함 등의 의미이며, 따라서 공자에게서는 인이 용勇이나 무武를 제어하는 위치에 자리한다.
******출처는 한비자인데 유교 경전에는 다르게 적혀 있으면 뒤에 수정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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